작가노트 #10 – 백탑아집(白塔雅集)
백탑아집, 45.6×73㎝, 한지에 수묵담채, 2015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난 이후 급격하게 상업도시로 변해간 한양은 인구가 증가하고 신분질서가 흔들리며 변화의 시대를 맞이한다. 기성 질서와의 갈등과 혼란 속에서 청나라의 앞선 문물과 번영을 경험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정신을 가진 학자들의 모임이 백탑파이다.
오늘날 서울시 종로 2가 30번지 탑골에는 흰 대리석으로 만든 원각사지십층석탑이 있는데 이를 백탑이라 불렀으며, 이곳에 모여 살던 연암 박지원, 초정 박제가, 청장관 이덕무, 담헌 홍대용, 관헌 서상수, 영재 유득공, 강산 이서구 등은 신분과 연령의 벽을 넘어 우정을 나누며 열린 소통의 사회로 만들고자 했다.
그들의 학문은 조선의 자생적인 근대화의 토대가 되었고 이후 개화파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으나, 일제강점으로 주체적인 역량을 잃게 되었다.
그림은 1768년경 박지원이 32세에 백탑근처로 이사해 이덕무,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과 가까이 지내며 박제가와 이서구가 제자로 입문하였을 무렵이다. 달빛아래 멀리 백탑이 보이고, 눈 내린 깊은 밤, 달빛아래 박제가가 친구들이 모여 있는 서상수의 관재를 향해 가는 모습을 담았다. 백탑의 여러 집 가운데 서상수의 관재가 인기가 좋아 이들이 주로 모이는 시회장소가 되었기에 관재를 그림의 중심에 놓았다. 박지원이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이덕무에게 윤회매 만드는 법을 배워 서상수에게 판매하고 19푼을 받았다는 매매문서가 「윤회매십전」에 실려 있다는 것을 보고 착안한 장면이다. 누구의 매화가 진짜 같은지를 겨루는 일화 등을 종합하여 장면을 구성하였고 매화인지 눈인지 명확하지 않는 표현은 그들의 정신과 시련을 동시에 표현한 것이다.
올적엔 달빛이 희미했었는데 취중에 눈은 깊이도 쌓였네.
이러한 때 친구가 곁에 있지 않으면 장차 무엇으로 견딜 것인가.
내게는 즐겨 읽던 「이소」가 있으니
그대는 해금을 안고 야심한 밤 문을 나서 이덕무를 찾아가세.– 눈 내리는 겨울날 착암 유연옥의 집에서 해금 연주를 듣던 박제가가 한밤중에 자신의 벗 이덕무가 보고 싶어 찾아가는 마음을 담은 「정유각집」의 글 중에서
서쪽 골짜기 울창한 노송은 눈을 덮어썼는데
샛별 하나 응당 먼저 나와 있겠지.
어둠 속에 가지런한 기와는 나직해 보이는데
눈길 속에 무지개다리 아른거려 더욱 시름겹네.
외롭게 추위 속에 어디를 가는가.
백탑 아래 매화 핀 것 보러 간다네.– 박제가, 『초정전서』, 황혼에 형암을 방문하다 중에서
– 작가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