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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12 – 연암산방(燕巖山房)

연암산방, 94×44㎝, 한지에 수묵담채, 2021

1771년(영조47), 당시 홍국영이 권력을 잡아 집권하고 있을 때 반대당인 벽파에 속해 있던 연암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과거를 포기하고 이덕무, 이서구, 백동수와 함께 개성을 유람하다 황해도 금천군의 개성에서 30리 떨어진 연암협을 답사하며 이곳에서 은거할 것을 기약하여 연암이라 자호하였다. 황폐해서 사는 이가 없었던 이곳에서 이후 일가족을 이끌고 은거 생활을 시작하는데 낭떠러지 절벽이 감싸 안은 초목만 무성한 골짜기 안을 개척하여 자갈밭 몇 이랑에 초가삼간을 마련하여 살게 된다. 이곳의 지세를 기록한 당시의 글을 보면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제가 산골짜기로 들어와 살려고 마음먹은 지가 벌써 9년이나 되었습니다. 물가에서도 잠자고 바람도 피하지 않고 밥 지어 먹으며 그저 양손을 불끈 쥐고 마음은 고달프고 재주조차 없으니 어디 성취한 것이 있겠습니까? 겨우 자갈밭 몇 이랑에 초가삼간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낭떠러지 절벽과 감싸 안은 골짜기에는 초목만 무성하여 산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조차 없습니다.

골짜기 입구에 들어서면 산자락은 다 숨어버리고 길조차 찾을 길 없습니다. 산등성이는 평평하고 기슭은 야트막하여 흙 빛깔은 희고 깨끗하며 모래알은 투명하고 지세(地勢)는 넓게 트여 집터의 형국을 완전히 갖추었습니다. 그래서 남쪽을 향해 조그만 집을 지었는데 그 집터가 아주 비좁기는 하지만 그래도 쉴 만한 공간으로는 아주 적당합니다. 집 앞 왼편으로 깎아지른 듯 푸른 벼랑이 병풍처럼 서 있고, 깊숙한 바위틈 사이가 동굴처럼 되어서 그 속에 자연스럽게 제비들이 둥지를 틀었으니, 이것을 바로 연암(燕巖), 즉 제비바위라고 부릅니다.

당시의 글들을 참고로 하여 사진 상으로만 남아 정철조가 그렸다는 설과 연암이 직접 그렸다는 설이 있는 「연암도燕巖圖」 (연암수적燕巖手蹟 후손 朴泳殷 소장)를 참고하여 구성하였다.

그림 속 연암은 화면을 등지고 앉아 있다. 세상과 섞이지 않은 은자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입고 있는 의상 또한 초상화의 의복과 일치시켰다. 고개를 돌려 집 앞 왼편의 제비바위(燕巖)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은 이곳에 애착을 갖고 있는 연암의 마음을 담았다. 사진으로 남아 있는 「연암도」는 출입문까지만 보여주는데 그림에서는 『열하일기』의 「산장잡기山莊雜記」에 기록된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를 토대로 집 앞에 시냇가를 그려 넣었다. 기록을 읽다보면 수량이 있는 폭이 넓은 것으로 추측된다. 시냇가의 위치는 사진 속 그림 우측 하단에 버드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뿌리가 물가에 위치한다고 생각하여 그 주변으로 자리하였다. 자료로 주어진 사진 속의 경물들을 최소한으로 그린 것은 연암의 맑은 정신을 담아주려 한 의도가 있다.

– 작가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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