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노트 #9 – 여담재 개관 기념 매화전을 열며
매화희신보(梅花喜神譜), 한지에 수묵담채, 17.5×11.5cm x 130, 2018
나는 흙이고 증발하는 수증기일 뿐이다.
여러 분야의 그림을 공부하면서 특별히 매화를 사랑하게 된 것은 아마도 내 삶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군데군데 파인 깊은 옹이는 그간 감당하기 어렵던 상흔 같고 껍질만 겨우 붙어있는 등걸은 견디기 힘겹던 순간들의 고통을, 뒤틀린 가지의 형상은 정처없이 방황하던 감성의 순간들을, 그리고 죽은 듯 앙상한 가지는 메마른 삶의 결을 느끼던 순간들이 떠오르며 그간 걸어온 내 삶의 고됨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피워낸 눈부신 옥 같은 하얀 꽃봉오리가 삭막한 겨울의 끝에 눈물겹게 피어난다.
시련이 끝이 없음을 보란 듯 눈보라가 치지만 이제 매화는 시기하듯 내리치는 눈송이를 흩날리는 꽃잎인 냥 넉넉히 감싸 안는다. 그리고 의연히 열매를 향한 숭고한 생애를 살아간다.
그렇게 시작한 매화와의 인연이 매화를 그리기 위한 긴 여정을 걷게 했다.
수묵화를 그리기 위한 서예공부와 동양정신의 탐구, 동북아의 매화자료를 수집하고 구도와 작가의 의취(意趣)를 연구하며 모사하는 과정과 오래된 매화가 있는 곳을 찾아 사생하며 생장과정의 특징을 조사하고 나만의 매화를 그리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매화는 가장 친근하고 위로가 되어주는 벗 같은 존재가 되었다.
여담재가 세워진 이곳은 2015년 개인전을 준비할 때 인연이 시작된 곳이다.
그때 나는 매화전시에 이어 매화 같은 삶을 살았던 우리 역사 속의 인물들을 조명해 보는 주제의 전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지봉 이수광(1563~1628)이 선정 인물 중에 속해 있었다. 그 당시는 지금의 여담재가 없이 이수광이 살았던 곳이었음을 기념하던 비우당만 아파트로 둘러 싸여 덩그러니 있었는데 비우당과 낙산공원 주변을 여러 차례 답사하면서 그의 아름다운 삶의 자취를 그려보려고 애를 썼지만 지봉의 숨결을 담을 수 없었던 자료의 한계와 원래의 지세를 찾아보기 어렵던 주변 환경으로 인해 그림으로 제작하지 못한 아쉬움을 간직하게 되었다.
이후 5년, 여담재의 개관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한 곳이 비우당 옛터라는 것에 반가웠고 개관 기념 전시로 매화전을 하게 된 것도 이수광과의 아쉬웠던 인연과의 개연성이 있는 듯했다.
그리고 이곳이 단종의 비였던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가 폐위되어 살던 곳이었음을 알게 되었는데 여담재가 정순왕후의 기념관을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한 장소라는 점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역사는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지만 남편의 죽음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박에 없었던, 아니 생이별로 인해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한 많은 여인의 삶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버려진 그 여인이 지조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삶을 살았었는지는 더더욱 관심밖의 일이다.
지금도 그러하다 세상의 반이 여자이고 반이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뉴스나 신문지상은 남성우위의 점유율을 자랑하고 있다. 그 많은 여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우리사회에서 여성은 제한된 사회적 역할이나 억압된 가정안에서의 희생양으로 살아가길 부지불식간에 강요되어 살아온 것 만은 사실이다. 제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육아라는 관문 앞에서는 자발적 백기를 들 수밖에 없는 것이 자아를 실현하고 싶어 몸부림 치는 대부분의 현대 여성들이 겪는 역경이 아니었을까? 과거부터 근대기의 여성들이 남성들과 대등하지 않았던 암울한 사회 분위 속에서도 꿈을 꾸는 것을 멈추지 않고 처절하게 몸부림쳐 왔기에 그나마도 개선된 지금이 있는 것이고 지금도 이 과정은 계속되고 있다.
뼈 속 깊이 시린 추위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꽃을 피우고 결실을 맺는 의지와 정신, 이것이 매화로 말하고자 하는 그것이다.
– 작가노트